그는 왜 묘비명을 '게임 고수'로 써달라고 했나

입력 2023-06-15 11:22   수정 2023-06-19 00:23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예컨대 심장충격기와 인공호흡기가 나오기 전에는 심장이나 호흡이 멎은 사람을 망자로 봤다. 지금은 아니다. 뇌의 기능이 정지하는 뇌사까지 진행돼야 죽었다고 본다.

2000여 년 전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죽음의 기준이 좀 더 낭만적이었다. 당시 그리스·로마인들은 몸의 기능이 멈추더라도 영혼은 저승으로 넘어가 계속 살아간다고 믿었다. 이들이 죽음을 변화, 여행, 잠, 이별 등의 단어로 표현했던 이유다. 하지만 영혼마저 소멸해 ‘진정한 죽음’을 맞이할 때가 있었으니, 세월이 흘러 망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지는 경우였다. 그래서 죄인과 관련된 기록을 없애는 ‘기록 말살형(刑)’은 당시 최악의 형벌 중 하나로 꼽혔다.

‘진정한 죽음’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오랫동안 기억되도록 비석을 화려하게 꾸미고, 행인의 눈에 잘 띄는 길가에 묘를 썼다. 길에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자리값’이 더 비쌌다고 한다. 자신의 특징을 묘비나 유골함에 새기기도 했다. 서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에 나온 유골함이 단적인 예다. 이 유골함에는 보드게임을 하는 망자(사진)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양희정 학예연구사는 “망자가 ‘게임 고수’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의도”라고 했다.

지난 15일 박물관 상설전시관 그리스·로마실에서 개막한 이번 전시에는 이처럼 그리스·로마인들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유물 120여 점이 나와 있다.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에서 빌려온 소장품들로, 600년간 유럽을 호령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수집한 유물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방한한 게오르크 플라트너 빈미술사박물관 부장은 “지난해 10월부터 올 3월까지 열리며 3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을 계기로 이번 전시가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1부 ‘신화의 세계’ 작품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진 신화와 관련된 유물이 나와 있다. ‘신들의 아버지’ 유피테르(제우스의 로마식 이름)를 비롯해 영어식 발음 ‘비너스’로 잘 알려진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 베누스(아프로디테의 로마식 이름) 등 그리스·로마 신화 속 주요 신들을 조각한 대리석 작품을 볼 수 있다.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을 한 그리핀과 인간의 머리에 말의 몸을 지닌 켄타우로스 등 유명한 괴물을 조각한 작품과 함께 소형 청동상, 도자기, 등잔 등도 나와 있다.

전시 2부 ‘인간의 세상’에서는 로마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전시 디자인이 돋보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하이드리아누스 황제 등 로마의 지도자들을 비롯해 주로 실존했던 인물들의 초상 조각을 감상할 수 있다. ‘라오콘 군상’ 등 그리스의 유명 조각 걸작들을 로마 시대와 훗날 바로크 시대에 똑같이 만들거나 축소 복제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전시 막바지 ‘그림자의 제국’에서는 유골함을 비롯해 그리스·로마인들의 장례의식과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나왔다.

전시공간은 협소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작품도 없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양질의 그리스·로마시대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충분히 박물관을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전시다. 게다가 무료다. 전시 기간은 넉넉하다. 2027년 5월 30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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